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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 MELTED/명언 생각 한 스푼

장자크 루소가 우리에게 남기는 인생 명언 | 모든 불행의 근원은?

by 우공이부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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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루소는 우리에게 인생의 교훈이 될만한 인생 명언을 남겼다!

나의 불행은 과연 나 자신으로부터 생기는가?

당신의 불행은 당신 자신으로 부터 생긴다는 것에 동의를 하는가?

'모든 불행의 근원이 자기자신이라니' 루소는 왜 이렇게 말을 해야만 했을까? 

남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의 말로를 떠올려보면 답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자크 루소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의 삶은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장자크의 인생을 한번 들여다보자!

 

당신의 모든 불행은 당신들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루소-

이미지 픽사베이

루소 그는 누구인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그는(6/ 28/1712 ~7/2/1778)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10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도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져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만

했다고 하네요.

프랑스에서의 활동

1728년 제네바에 우연히 들른 루소는 환대를 받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발길을 돌려 그곳에서

장 소세프라는 세례명으로 로마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루소는 드 베르셀 리 부인의 시종과 구봉

백작의 서기를 겸직했다.

바랑 남작 부인의 후원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사제가 될 의향이 없어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르 메트르의

지도하에 음악을 공부한다.

 

1730년 로잔으로 이주하여 가명으로 음악사 생활을 했다. 다음 해 루소는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후

리옹을 거쳐 샹베리 등지에서 생활했다.

 

1732년부터 1740년까지 샹베리와 샤르메트에서 바랑 부인 곁에 살면서 음악에 몰두하고, 많은 독서를 

하며 다방면에 걸쳐 교양을 쌓는다. 1741년 계몽주의자인 달랑베르, 디드로와 파리에서 만나 친교를 

맺었다.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정리하고, 파리로 가서 그것을 아카데미에서 발표하지만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역시 성공의 기반에는 많은 독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많은 독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1745년 루소는 여러 귀족부인과 사귀었지만, 결국 23살의 하녀, 마리 테리즈 르 바쉬에르와 오랜 동거를

거친 후 결혼했다. 루소는 그녀가 낳은 5명의 아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1749년부터 루소는 디드로와 친교를 맺은 후, 그의 권유로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술 공모전에 [학문 및 예술론]

이 1등으로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으며, 작사·작곡한 오페라[마을의 점쟁이]가 공연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해서 음악과 정치 경제 항목에 할당된 글을 쓰고 다음 해에

계몽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학문 예술론을 출판한다.

정치성향

1754년 디종의 학술원에서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라는 주제로 학술연구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정치, 사회제도에 관해 골몰, 소유권 제도와 사회 조직의 발전으로 생긴 불평등과 비참함을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와 대립시켜 설명했다. 이는 이후 [사회 계약론]의 바탕을 이루었다.

 

1762년에 저술한 [사회 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국가 상태에 있어서 확정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사회 계약론을 전개하고 인민주권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권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조건으로

'항상 정당한' 일반 의지를 설정하고, 실제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다수결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저술활동

1762년 에밀과 사회계약론 등 18세기 사상계를 자극한 대작을 계속 발표하였다.

에밀에 서술돼 자연 종교의 이론과 그의 피해망상적 행위로 각 방면에서 박해를 받았다. 특히 성직자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 그에 대한 체포장이 발부되어 1762년 스위스로 피했다.

당시의 전통과 기득권을 부정하고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타파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던 작품인 에밀은

예수회의 출판 방해 공작으로 외국인 네덜란드에서 출간되고 4개월이 지나서야 프랑스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루소는 1762년부터 8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하는데, 1764년 [시민들의 감정]이라는 익명의 작품(볼테트로 밝혀짐)

이 제네바에서 나타나 루소를 공격한다. 이것에 응수하기로 결심하고서 [고백]을 집필하기 시작해서 1769년에

완성하고, 1770년 파리로 돌아와 1772년부터 1776년에 걸쳐 [루소가 장자크를 판단한다]를 쓴다.

 

1777년[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명상하지만 집필을 끝내지 못하고 

1778년 7월 2일 죽는다.

 

일반의지

루소에게 의지는 추구하거나 회피하고, 긍정 또는 찬성하거나 부정 또는 반대하려는 마음으로서, 감정, 이성

과는 별개로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능력의 하나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언급된 일반의지는 "모든 공동의 힘으로

개인과 각 연합자의 이익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그에 따라 각자는 전체에 결합함에도 오직 자신에게만 복종하여

전처럼 자유롭게 남게 되는 연합 형태"를 추구하려는 의지이다. 이런 의지를 가진 개인이 모여 사회계약행위를

함으로써 국가를 창설한다면 국가 자체는 물론 국가의 모든 권력은 일반의지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 되며, 그

국가는 "개인과 각 연합자의 이익" 즉 "공공선"을 추구하게 됨과 동시에 "전체에 결합" 되는 것 외에는 어느

개인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구성원 모두의 "동등한 자유" 즉 평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계약행위를 

하는 당사자들 중에는 이전의 국가체제를 고수하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사적인 개별 의지를

가진 사람도 존재하므로, 모든 인민의 의지의 합인 전체 의지는 일반의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

계약에 의해 국가가 성립되고 난 뒤에, 의회에서 표출되는 국가의 존립, 정부 구성, 기타 인민의 요구사항에

관한 다양한 의견 중에서 어느 것이 "공공선과 동등한 자유"에 해당 또는 가까운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된다. 루소는 의회의 심의에 의해 표출된 의견이 가진 공공선과 자유에 관해 넘치는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을 가감하고 남은 의견에서 일반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단, 의견을 공유한 의회 구성원들이 파당을

형성하여 개별 의지에 불과한 자신들의 의견을 다수 득표 의견으로 만들어 일반의지로 둔갑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거나 제도적으로 방지되는 상황에서, 의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내면의 빛에 따라 심의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평등 

루소는 사상 최초로 인간평등 문제를 실천적으로 파고든 철저한 평등주의자다. 계몽철학자들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당위적 차원에서 이고, 사실상 엘리트주의였다. 천재 철학자 칸트조차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 듯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라고 했다.

 

사회구조의 변혁을 통한 평등의 실천

이렇듯 루소는 삶 자체도 그렇거니와 철학 자체도 평등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등에 골몰했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 '경제 불평등'에 있다고 단언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문제가 만연 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이를 '일반의지론'

으로 풀어나갔다. 마키아벨리가 분열된 조국을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위정자가 어떠한 절대적 권한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듯, 루소도 수천 년에 걸쳐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혁이 절대적

으로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철학 이념으로 일반의지의 필연성을 역설한 것이다.

원래 일반의지는 신의 의지를 원용한 말이고 이는 또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연원 하며 칸트의 선의지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일반의지는 상식과 달리 단순히 보편적 생각이 아니고 진리와 선을 전제하는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일반의지가 만인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고 일인의 견해라도 일반의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 표시 - 동일 조건변경 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위키피디아에는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오늘 명언에 관련되어 필요한 부분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면 위키피디아에서 "장자크 루소"로 검색해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생각 한 스푼]

만약 루소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지 않고 평범한 아이들과 같이 자랐다면 어떠했을까?

그가 이렇게 평등에 대한 근원적인 부분까지 생각을 하며 자신만의 사상으로 적립을 시킬 수 있었을까?

 

앤드류 카네기는 "부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가 평등을 그리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평등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어린 루소의 눈에 비친 세상은 과연 평등한 세상이었을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 유년시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아버지도 자신을 버리고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그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아마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그의 다섯 아들들을 고아원에 보낸 건 아닐까?

 

"당신의 모든 불행은 당신들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나는 이 말이 어느 시점에 쓰여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지만 그의 저서들을 다 읽어보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다만 이게 알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불행은 생각으로 만들어진 불행일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다가오는 불행일까?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서 생긴 불행을 질책하는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그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불행은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유명한 철학자이며 사상가가 된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서 태어나는 모든 후대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행동하라. 명상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써라, 그러면 모든 불행은 극복될 것이다."

                                                                              - 생각 한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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